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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온 풍경

신성한 약속 - 김정자의 <내게 온 풍경>

글 :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

 

  김정자의 신작 <내게 온 풍경>은 사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진프로세스만의 고유한 방법인 흑백프린트(Galatine Silver print)와 백금인화(Platinum & Palladium print)를 새롭게 선보이며 풍경사진의 가치를 극대화하였다.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김정자는 까다롭고 어려운 과정을 감수하며 사진을 탄생시켰다.

김정자는 그동안 세계의 성소(聖召)를 찾아 사진-순례에 나섰고, 그 결과물은 벌써 세 권의 사진집으로 출판되었다. 그녀에게 사진은 예배와 기도에서 중요한 매개가 되는 신물(神物)이다. 신작<내게 온 풍경>은 그녀의 오랜 사진염력이 구체화된 것으로, 풍경-대상을 단순히 사진으로 옮겨온 것이 아닌 세계/작가가 사진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특별한 안식처를 만들었다. 사진-순례를 떠난 그녀에게 마침내 아름다운 풍경이 신성한 약속처럼 인화지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풍경은 어떻게 작가에게로 왔을까. 작가가 풍경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풍경이 작가를 발견한 것인데, 시각우위의 주체인 인간에게 풍경이 사로잡히지 않고 풍경이 스스로 작가에게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풍경사진을 촬영하는 이에게 귀한 자세를 심어주는 것이라 믿는다. 사람보다 먼저 자연-풍경은 제 자리에 있었고 우뚝 선 존재가 풍경이기 때문이다. 즉 풍경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가장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풍경사진을 찍는다’는 말은 풍경을 모르는 사람의 표현이다. 결코 찍을 수 없는 것이 풍경이고, 인물사진과 함께 인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풍경이기에, 우리는 풍경 속에 다만 머물 뿐이다. 김정자는 풍경 속에 고요히 있었다.!

풍경을 알려고 하기보다, 풍경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이 평화롭게 빛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풍경(風景)’이라는 단어 속에서 바람이 만들어낸 경관, 바람과 햇볕, 그리고 그림자의 경관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람과 햇볕과 그림자의 표상이 풍경이다. 그 말처럼 풍경이 사진으로 올 때는 특별한 절차가 요구된다.

가장 스스로 빛나게 할 것! 김정자가 젤라틴 실버 프린트와 백금 프린트를 한 이유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입자들을 심어주고 싶은데, 디지털 프린트에는 그 ‘입자’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살아 있는 바람과 햇볕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부각시키려면 바람과 햇볕의 근육을 만들어야 하고, 평면으로 옮겨 올 때 빛나는 입자들에 의해 비로소 근육이 형성된다. 이처럼 필름에 잠상으로 잠들어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깨워 내 앞에 현현하게 하는 전 과정은 사진-존재와 나눌 수 있는 은밀한 사랑의 순간에 다름 아니다. 어둠 속의 사진을 깨우고 사진을 만지고 사진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사람의 여정.

 

내게 좋은 풍경사진은 풍경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인데, 비가시적인 흔적이 드러나려면 사진가와 풍경 간의 비밀스러운 공명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내 안의 상처가 드러나듯, 좋은 사진을 보는 일은, 어쩌면 내 안의 흔적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즉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바깥의 바람을 바라보게 하듯이, 풍경-사진이 내 안에서 다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험, 이러한 경험이 온전한 여백을 갖춘 김정자의 사진 앞에서 고조되는 이유는 정교한 프레이밍(framing)과 흑백사진의 톤(tone) 때문이다. 특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사진의 마술적인 힘이라고 전제했을 때, 보다 정교한 프레이밍과 톤을 미학적 장치로 삼아 사진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함은 모더니스트 사진가인 김정자에게는 소망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사진에 임하는 자세가 엄정하고 절제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누구에게나 비슷해 보일 범속한 것을 세련시키거나 보다 높은 차원으로 변용시키려는 일관된 의지, 꼿꼿하고 단정하고 과장되지 않은 사진-언어는 김정자 사진의 미덕이다.

 

롤랑바르트에게 좋은 풍경사진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주는 사진’ 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프로이드의 ‘어머니 육체’를 예로 드는데, “우리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1)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머물렀을, 확실한 그 장소는 어디인가? 김정자의 사진에서 제주도가 담긴 사진들에 유독 눈길이 머문다. 간혹 제주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 섬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곳은 경험적 삶의 근거이자 구원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했다. 생의 사무친 한순간이나 언젠가 한때 확실하게 머물렀을 공간이 몹시 그리워질 때, 제주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체험의 한 형태로 제주와 제주의 바람이 불어왔다 불고 가기 때문이리라. 김정자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서있게 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내게 온 풍경>은 풍경이 작가에게 제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관객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수용될 것이다.

 

 

1)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역, 열화당,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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